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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명곡해설 & 클래식명곡해설 - 작곡가편

루트비히 판 베토벤

[ Ludwig van Beethoven ]

루트비히 판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출생 - 사망 1770년 ~ 1827년
국적 독일
주요작품 교향곡 제1번 C장조 Op.21
교향곡 제2번 D장조 Op.36
교향곡 제3번 E플랫장조 영웅 Op.55
교향곡 제4번 B플랫장조 Op.60
교향곡 제5번 c단조 운명
교향곡 제6번 F장조 전원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교향곡 제8번 F장조 Op.93
교향곡 제9번 d단조 합창
서곡 코리올란 Op.62
서곡 에그몬트 Op.84
서곡 아테네의 폐허 Op.113
서곡 레오노레 제3번 C장조 Op.72b
피아노 협주곡 제3번 c단조 Op.37
피아노 협주곡 제4번 G장조 Op.58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플랫장조 황제(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7중주곡 E플랫장조 Op.20
현악 4중주곡 제6번 B플랫장조 Op.18의 6
현악 4중주곡 제9번 C장조 라주모프스키(실내악곡)
현악 4중주곡 제15번 a단조(실내악곡) Op.132
현악 4중주곡 제16번 F장조 Op.135
피아노 3중주곡 제5번 D장조 유령(실내악곡) Op.70의 1
피아노 3중주곡 제7번 B플랫장조 대공(실내악곡)
세레나데 Op.8 및 Op.25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F장조 봄(실내악곡)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A장조 크로이처(실내악곡)
첼로 소나타 제3번 A장조(실내악곡) Op.69
첼로 소나타 제5번 D장조 Op.102의 2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 비창(독주곡)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샵단조 월광(독주곡)
피아노 소나타 제15번(독주곡) D장조 전원 Op.28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d단조 템페스트 Op.31의 2
피아노 소나타 제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 Op.53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f단조 열정(독주곡)
피아노 소나타 제26번 E플랫장조 고별 Op.81a
피아노 소나타 제 29번 B플랫장조 하머클라비어 Op.106
피아노 소나타 제 32번 c단조 Op.111
디아벨리의 왈츠를 주제로 하는 33개의 변주곡 Op.120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
6개의 바가델 Op.126
로만스 G장조 Op.40
로만스 F장조 Op.50
모차르트의 마적 주제에 의한 7개의 변주곡 WoO. 46
미누에트(독주곡)
피델리오 Op.72
장엄 미사(성악곡)
자연에 나타난 신의 영광 Op.48의 4
아득히 먼 연인에게
그대를 사랑해

본(Bonn)에서 12월 17일 태어났다(추정). 같은 해의 태생으로는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 헤겔이 있으며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출생지 본은 라인 강 상류 서안의 문화 · 정치 · 종교 · 군사상의 중요 도시이며, 그의 생가는 오늘날도 베토벤(독일)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 요한은 궁정의 테너 가수로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차남 루트비히와 3, 4남을 제외하고 일찍 죽었다. 두 동생은 술꾼에다 벌이가 없는 아버지와 함께 이윽고 베토벤(독일)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본 시대의 친한 사람들

처음에는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피아노를 중심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의 꿈은 아들을 모차르트(오스트리아)와 같은 천재 음악가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루트비히의 나이를 속이게 한 적도 있었지만 타고 난 노력형인 그에게 신동적인 화려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단지 1787년(17세) 빈 연주 여행에서 모차르트(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의 장기인 즉흥 연주를 하여 주목을 받았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베토벤(독일)의 작곡 재능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지도를 한 것은 궁정 오르가니스트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였다. 그는 교육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돌봐 주었으며, 겨우 13세로 부궁정 오르가니스트의 지위를 주고 제2의 모차르트(오스트리아)로서 세상에 소개한 바 있다.

브로이닝(Breuning) 가의 사람들도 본 시대의 베토벤(독일)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피아노 가정 교사로서 그 저택에 드나들고 있었는데, 장녀 엘레오노레(Eleonore)와의 사이에는 어렴풋한 연정도 싹트고 있었다. 정규 학력으로는 국민 학교를 중퇴했을 뿐인 베토벤(독일)에게 있어 브로이닝 가는 교양과 사교를 몸에 익히는 수행장이었다. 여기서 알게 된 귀족들 중 발트슈타인(Waldstein) 백작은 그 후 좋은 이해자로서 이 젊은 음악가에게 물심양면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단기간이지만 청강생으로서 접한 본 대학의 피셀니히 교수도 또한 좋은 이해자였으며, 슈나이더 교수의 정열적인 강의는 청년 베토벤(독일)의 자유 사상을 크게 계몽하는 것이었다.

빈의 젊은 마이스터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은 역시 빈이었다.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이미 죽었지만 하이든(오스트리아)은 건재했고, 정정(政情)은 불안했으나 음악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재력과 취미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본에 싫증을 낸 베토벤(독일)은 하이든(오스트리아)에의 정식 입문을 결심했다. 다행히 발트슈타인 백작의 주선으로 관비 유학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백작의 소개로 리히노프스키(Lichnowsky) 후작의 살롱을 비롯한 빈의 사교계에 드나드는 편의도 주어졌다. 빈 유학은 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으로 실현되었으나, 주위의 악풍은 아직도 보수적이어서 신참 청년 음악가가 인정받기에는 높은 벽이 있었다. 모처럼 사사한 하이든(오스트리아)도 바쁜 생활로 새 제자를 돌봐줄 수 없었으며, 오늘날에는 무명에 가까운 작곡가들에게 지도를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먼저 탁월한 피아노 연주로 빈 악계에 데뷔했고, 작곡도 당연히 피아노 음악에 중점이 놓였다. 1795년(25세) 최초의 공개 연주회에서 자작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젊은 마이스터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해부터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 완성되는 1800년까지를 3기로 분류하는 그의 창작가의 제1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시기에는 「7중주곡」 Op.20, 6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Op.18(모두 1800), 피아노 소나타 「비창」(1798) 등의 중요 작품이 작곡되었다. 어느 것이나 전통적인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도처에 보이는 창의는 이미 거장의 장래를 암시하고 있다.

불멸의 애인'과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베토벤(독일)은 작은 키에 빛깔도 검고 풍류가 없는 메마른 느낌이어서, 하이든(오스트리아)은 ‘몽고 대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하며, 귀족 사회의 우아함과는 인연이 먼 사나이였으나 그 인품은 어딘가 매력적인 데가 있었다. 1799년(29세) 브룬스비크(Brunsvik) 가의 테레제(Therese)가 여동생과 함께 입문했으며, 이듬해에는 구이차르디(Guicciardi) 가의 줄리에타(Julietta)가 입문하였다. 베토벤(독일)은 이 두 사람과 유명한 사랑을 하는, 젊은 마이스터에게 있어 혜택받은 청춘이었지만 이 무렵 그의 귀는 이미 이상을 보이고 있었다.

사후, 그의 유품 속에서 3통의 편지와 2통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는 두 동생과 한 여성에게 남겼으며, 편지는 연호도 수신인도 없지만 같은 여성에게 보낸 열렬한 연문으로, 특히 그 1통에서는 ‘나의 불멸의 연인이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여성이 줄리에타인지 테레제인지, 혹은 딴 여성인지 여러모로 논란을 빚어 왔다. 줄리에타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월광」(독주곡)(1801)을 바쳤으며, 테레제와는 1806년(36세)에 약혼한 바 있다. 이 약혼은 불행히도 깨어지나 두 사람의 애정은 그 후에도 계속되고, 둘 다 일생을 독신으로 보낸다.

베토벤(독일)의 애정의 대상은 어느 것이나 신분이 다른 귀족이나 부호의 딸로서, 계급을 초월한 사랑은 자유 사상가답지만, 동시에 그것이 파정을 초래하는 커다란 원인이었다. 1802년(32세) 여름 의사의 권유로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로 요양을 간 그는 귓병의 불치를 인정하고 ‘너무도 가혹하십니다’라고 써서 남겼다 그러나 창작에의 의욕은 마침내 달콤한 죽음의 유혹을 물리치고 악마 같은 인생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이윽고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실내악곡)(1803)를 실마리로 빛나는 제2의 창작기로 들어간다.

‘걸작의 숲’ 명작의 시대

1804년(34세) 교향곡 제3번 「영웅」을 완성했다. 착상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얻은 것으로, 처음에는 나폴레옹 1세에게 바칠 예정이었으나 황제 취임에 분노하고 이것을 파기했다. 단호하게 울리는 첫머리의 2개의 으뜸 화음은 로망 롤랭이 ‘걸작의 숲’이라 부른 명작기의 도래와 전통적 작품에의 결별을 고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이후 1806년의 「바이올린 협주곡」,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라주모프스키」(실내악곡), 「교향곡 제4번(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서곡 「코리올란」(관현악곡)(1807), 피아노 소나타 「열정」(독주곡)(1805), 교향곡 제5번 「운명」(교향곡), 교향곡 제6번 「전원」(1808) 등의 명작이 잇따른다.

그리고 1809년(39세)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협주곡) 「황제」로 제2기의 명작 시대가 승리의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해에 나폴레옹군은 빈을 점령, 이듬해에는 테레제와의 약혼도 파혼되어 그의 생활은 새로운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그토록 왕성했던 창작 활동도 침체되었다. 친밀하게 교제했던 루돌프 대공에게 바친 피아노 3중주곡 「대공」(실내악곡)과, 대공과의 잠시 동안의 빈 이별을 동기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고별」(1810)에서는 그 빛나는 승리감을 구할 수 없고, 고독한 내성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윽고 찾아오는 제3기의 작풍이 깔리기 시작한다.

「전쟁 교향곡」

교향곡 제7번(교향곡)」(1812)의 초연은 보기 드물게 대성공이었는데, 이것은 동시에 상연된 묘사 음악 「웰링턴의 승리」(일명 ‘전쟁 교향곡’)가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에 들끓는 빈 시민에게 열광적으로 환영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거의 돌아다보지 않는 이 곡을, 사람들은 베토벤(독일)의 대표작으로 치고 있었다. 「교향곡 제8번(교향곡)」(1812)의 초연도 같은 연유로 해서 성공했는데, 이때 「전쟁 교향곡」은 이미 네번째의 상연이었다.

그의 세속적 명성은 이렇게 빈 회의에 걸친 반동기(反動期)에 크게 높아졌지만, 그 창작 활동은 절망적인 침체에 빠져 있었다. 귀는 이미 들리지 않아 연주 활동은 불가능했으며, 일상의 대화조차 대화장(對話帳)을 필요로 했다. 불초한 조카 카를은 그를 배반하였고, 보호자였던 귀족들도 몰락하거나 이주하기도 해서 물질적 궁핍도 매우 심했다. 이제 유일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은 올뮈츠의 대사교로 취임했다. 그의 생애를 엄습한 이 제2의 위기를 타고 넘어 절망의 골짜기에서 기어오르려면 뭔가 실마리가 필요하였는데, 대공의 대사교 취임식을 위한 「장엄 미사(성악곡)」(1822)의 착상은 그의 마지막 심지를 당기게 하였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리라

그는 미사의 완성에 온 힘을 쏟았다. 구상은 써 나아감에 따라 거대해졌으며, 결국 취임식에는 연주되지 못했지만 그는 총보의 첫머리에 ‘마음에서 또다시 마음으로 가리라’라고 적고 대공에게 바쳤다. 미사 완성을 위해 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미사와 병행해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Op.109, 110을 비롯한 작품은 쉽게 돈 마련이 되지 않았으며, 부랑자로 잘못 알고 유치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침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교향곡의 의뢰가 있었다. 이전부터 구상한 새로운 교향곡이, 본 시대부터 품고 있었던 실러의 장편시 『환희에 부쳐 Ode to Joy』 음악화의 소망과 결합하는 기회에 이르렀다. 최후의 대작, 교향곡 제9번 「합창」(교향곡)(1824)은 이렇게 해서 실현된 것이다.

고고한 만년

대작에의 의욕은 아직도 있었지만, 러시아에서 돌아온 옛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슈판치히(Ignaz Schuppanzigh, 1776~1830)의 4중주단 결성은 그를 크게 자극했다. 마침 러시아의 갈리친 후작으로부터의 의뢰도 있어서, 그의 창작은 신품(神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마지막 5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을 완성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미 13년간이나 4중주곡을 쓰지 않았지만, 만년의 고독한 체념을 토로하는 데는 극도로 치밀한 이 형식이 가장 어울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Op.127(1825)에서 Op.135(1826)에 이르는 5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은 어느 것이나 자유로운 구성과 무심한 유희성을 가진 점에서 공통되어 있다. 작곡가 베토벤(독일)이 세상에서 줄 수 있는 마지막 정신은 이미 이것으로 끝내고 있었다. 1826년 12월 그나이젠도르프(Gneixendorf)에 사는 동생 요한의 집에서 돌아온 베토벤(독일)은 복부의 격통과 폐렴을 앓고 있었다. 청년 시대부터의 지병인 장 질환은 고치기 어렵게 악화되어 네 번 수술을 했지만 어느 것이나 효과가 없었으며, 이듬해 1827년 3월 26일 56세의 생애를 마쳤다. 쇼트 출판사로부터 마인츠 산 포도주가 도착했을 때 “섭섭하구나, 섭섭해. 너무 늦었어!” 라고 중얼거린 것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전무 후무의 대음악

베토벤(독일)은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나 음악사상에 남긴 공적을 생각하더라도, 전무 후무의 대음악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다소간에 의식 때의 반주나 사교 수단으로서의 성질을 갖고 있었던 그때까지의 음악은 그에 대해 인간 정신의 최고의 표현으로 높여진다. 특히 교향곡,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나 독주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 기악곡 영역에서의 작품은 인류 영원의 보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베토벤(독일) 이후의 음악가로서 기법이나 규모면에서 그를 능가하는 작품을 쓴 사람은 적지 않은데, 바그너(독일)나 브람스(독일)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드뷔시(프랑스)나 라벨(프랑스)처럼 베토벤(독일)과는 이질의 아름다운 울림을 찾아내고, 완벽하게 다듬어 간 음악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타오르는 듯한 정의감에 뿌리 박은 엄격한 도덕성을 그만큼 음악으로 일관시킨 예술가는 그 전에나 뒤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존경했던 J. S. 바흐(독일)나 모차르트(오스트리아)조차도 이 점에서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또 그가 생활한 사회의 건전성마저 나타내고 있다.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던 「영웅」으로 시작되는 작열적인 제2기는 새로운 시민 사회에의 빛나는 희망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빈 회의의 반동기는 그의 창작의 침체기였으며, 「합창」(교향곡)을 포함한 제3기는 최후의 저항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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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반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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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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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의 전반적인 시대적 흐름은 물론, 작곡가들의 생애와 작품, 그 주요 작품들을 테마 악보와 함께 설명하는 3부 구성으로 편집하여, 때와 장소와 인물을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해설 수록한 클래식 명곡 해설서의 정수이다. 자세히보기

  • 편저 삼호ETM 편집부

    저서로는 [쉬운 뉴에이지 피아노 베스트], [빨리 끝내는 베이스기타], [보컬 마스터 오디션 레슨북 - 여성용], [보컬 마스터 오디션 레슨북 - 남성용], [미치도록 쉬운 기타 연주곡집], [다시 부르는 추억의 명곡], [통기타교본], [아이 갓 리듬 체인지 I GOT RHYTHM CHANGES IN ALL KEYS], [스윙 스윙 스윙 Swing Swing Swing], [기타첫걸음교본 - 초보자용], [일렉기타교본 (하)] 등이 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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